늦은 가을 덕주사를 찾았습니다. 덕주사는 월악산에 자리한 사찰로 신라때에 창건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찰인데요. 덕주사까진 차량으로도 이용이 가능한 곳입니다. 덕주사가 자리한 월악산은 소백산과 속리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월악산의 정상을 영봉이라 칭하는데 산정상을 영봉이라 칭하는 곳은 백두산과 이곳 월악산 두 곳 뿐이라고 하네요.

남아선호 신앙이 깃들었던 원시 신앙지 덕주사
덕주사 뒷편 수산리쪽에서 바라보면 월악산 영봉의 모습이 마치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과 닮아 있어 옛부터 음의 기운이 강한 여자의 산이라 생각했다하네요.그래서 월악산 곳곳에 남자를 상징하는 남근석을 세워 음의 기운을 중화시켰다고 하는데요. 이 곳 덕주사 자리에도 세 개의 남근석이 남아 있는데 크기가 길고 하나는 작은데 그 중 하나는 가운데가 부러진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월악산의 음기를 중화시키고자 세워진 남근석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을 바라는 소망과 행운을 기원하는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변모했을거라 추측을 한다고 하는데요.이는 남근석 중 하나의 없어진 윗부분을 보고 그렇게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남근석뒤 감나무를 지나면 대웅전을 볼 수 있는데요.
대웅전 앞 넓은 마당 한쪽에는 범종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월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덕주사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에 창건되었다고 해요.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으나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손국한뒤 경순왕의 제일녀였던 덕주공주가 높이 15m의 거암에 마애미륵불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였으나 일생을 마친후 산의 이름을 월악산으로 절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덕주사는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상덕주사는 이곳에서 동편 계곡으로 1.5k 더 올라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은 마애미륵불,우공탑,삼층석탑 그리고 극락전과 요사터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상덕주사는 1951년 12월 전화로 소실되었으며 석축만 옛날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네요.

하덕주사는 어느때 절이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3m나 되는 탑, 기단석,연꽃문양석등,와편들이 절터였음을 보여준다고해요.현 대웅보전은 옛 하덕주사가 수재의 위험이 있어 1996년 성일화상이 새로이 절터를 이곳에 마련하여 창건했다고 하는데요. 절입구에 있는 남근석을 보면 이곳이 예전 남아선호 신앙이 깃들었던 원시 신앙지였음을 짐작케한다고 합니다.


1996년에 재창건되었으니 대웅보전의 건물 자체는 그리 오랜 역사는 아니예요.
그래서인지 단청의 원색이 아직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색이 바래도 멋있는데 말이예요.






처마끝에 매달린 풍경...
사찰의 멋을 가장 잘 보여주는 풍경인거 같습니다.
바람에 살랑살랑, 가늘게 풍경소리라도 들릴라치면 그 운치가 몇백배 더하지요.



대웅전에서 산신각쪽으로 중간쯤 지점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요. 이 비석은 1988년 월광사지입구의 논둑에서 발견된 것으로 비문이 인도의 산스크리트를 표기한 옛 글자인 범어로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비문은 모두 11행으로 첫줄에 대불정주라 음각된 한자로 시작되고 나머지 약 105자는 모두 범어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고려 후기 성행하던 수능엄경에 있는 능엄주를 새겨 넣은 것으로 불교 수행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실천과정은 어떠해야 하며 , 수행자들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새겨 넣었다고 하는데요. 우리나라에는 황해도 해주의 대불정다라니당등 몇 점의 범자비가 있는데 남한 지역에서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하네요.



산신각앞 대나무 숲 앞에는 누군가 쌓아올린 돌탑이 있습니다.
사람들 소망이 저 돌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겠지요.


덕주사 산신각..





곳곳에서 느껴지는 늦가을의 정취..



잔뜩 흐린 하늘을 다 덮을듯 감나무의 잔가지가 무성합니다.



마음으로 소원을 기원하며 돌아본 덕주사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듯한 흐린 날씨가 오히려 기분을 차분하게 해주었던거 같습니다.





Posted by 하늘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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