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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에서 내려 식당가와 민박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을 걷다보면 영국군 묘지 가는 길이란 이정표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 잠깐은 좁은 골목을 올라야하고 조금 지나면 뒤로 거문도 아름다운 바다가 눈에 들어오고 시멘트포장이 된 도로 양쪽으로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길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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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옆으로 유채꽃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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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 뒤를 돌아보면 도로 너머로 서도가 보이고 그 앞으로 흐르는 다도해의 푸른 바다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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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오른거 같습니다.이곳에도 묘지가 있는데 이건 주민들의 묘인듯합니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유채꽃이 피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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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가 200m 앞이란 이정표, 그리 긴 거리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잠시 쉬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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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에서 보는 풍경도 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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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고 걸으면 바로 앞에 돌계단이 나오는데 요 앞이 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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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를 2년간 무단 점령한 외세의 흔적 ,영국군의 해군인 동양함대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의 극동 항구 블라디보스톡을 공격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거문도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영국 내각은 1885년 거문도 선점권 확보를 의결하고, 당시 중국 주둔 함대 사령관이였던 윌리엄 도웰 중장에게 거문도를 점령할 것을 명하게 되는데요. 3척의 군함과 6백명의 병력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던 거문도 사건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 견제를 빌미로 1985년 거문도를 침법하여 포트해밀턴 섬이라고 이름 짓고 거문도를 영국군 주둔하에 뒀는가하면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을 지지하여 일본의 대한제국식민지화를 찬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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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영국 군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일본인들도 대거 들어왔다고 하는데요.현재 거문도의 행정 중심지인 고도는 당시만 해도 무인도 였다고 합니다.일본인들이 바다를 매립해 술집과 유곽을 짓고 길을 내었습니다. 현재의 파출소가 일제시대 지서가 있던 자리이기도 합니다.해방 직전인 1943년 거문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355명에 이르렀으며 고도 전체가 일본인 촌이였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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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지는 영국 해군이 거문도에 머물면서 총기및 기타사고로 사망한 수병의 무덤과 또 다른 사병의 무덤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서구식 화강함 묘비에는 1855년 총기사고로 사망한 2명의 수병에 대해 ,십자가 묘비에는 1903년에 사망한 수병1명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수 당시에는 7~9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3기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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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 시간이 흐르면 아픔도 잊혀져 갑니다. 그 자리에는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우리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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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옆 나무계단 사이에서는 풀꽃이 새 생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해가 뉘엿 뉘엿...거문도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벌써 수요일이네요. 요즘 감기 정말 대단해요. 저희 삼실만해도 저 포함 3명이 감기에 걸렸네요.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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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늘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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