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에서 보는 모습은 깨끗하고 괜찮습니다. 하지만 뒤로 돌아가 보면 앞쪽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여기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곳에선 장사를 할 수 없는 곳인데 좌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한푼이라도 벌어볼려는 심정은 이해는 되지만 보기엔 안 좋아보입니다.
폐건물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어가면 풍납토성의 뒤쪽입니다. 좁은 길도 그렇지만 이곳에는 쓰레기들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한낮인데도 음산한 분위기인데다 쓰레기까지 널려져 있으니 ....
어찌보면 앞쪽보다 이곳을 신경써서 청소해야할듯 보입니다.
녹이 슨 자전거 한대가 덩그러니 걸려져 있기도 합니다.
다시 앞쪽으로 걸어왔습니다. 한 커플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네요. 휀스를 넘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은 보이지 않나봅니다. 서로밖에 보이지 않을때이긴 하지만 지킬건 지키자쿠.... 절대 배아파서 그런건 아니라는...^^
너무도 다른 풍납토성의 앞과 뒤였습니다.
서울문화제 홈페이지에서 업어 온 풍납토성의 자세한 설명.... 좁 깁니다.
광주풍납리토성은 한강변에 위치한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 이웃한 몽촌토성을 비롯하여 석촌동고분군·아차산성 등과 함께 백제 초기의 가장 중요한 도성 유적의 하나이다. 현재의 명칭은 1963년 사적 지정 당시의 행정구역이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 성은 백제 책계왕(責稽王) 1년(286)과 개로왕(蓋鹵王) 21년(475) 조에 보이는 사성(蛇城)으로 비정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성벽 혹은 성내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백제 초기의 왕성(王城), 즉 하남위례성(河南尉禮城 ) 혹은 북성(北城)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삼국사기≫백제 온조왕(溫祚王) 조에는, "온조가 하남의 땅이 북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으로 고악(高岳)에 거하고, 남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은 대해(大海)로 가로막혀 있어 그 천험(天險)의 지리를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이 하남위례성의 대상지로 풍납리토성이 강력하게 부상되고 있는 것이다. 풍납리토성에서는 1925년 대홍수 때 성 남쪽 토사에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물교류를 알려주는 다리가 셋이고 자루가 달린 냄비인 청동제 초두 2점이 발견되었다. 그 외에 같은 시대의 토기편들이 성내 각처에서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1966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시굴 조사에 의해 토성의 축조연대가 백제 건국 초기의 철기시대로까지 올라갈 수 있는 풍납리식 무문토기의 유적 포함층이 확인되었으며, 1967년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 선사시대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친 토기 분포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하 3m에서 서기 3세기의 축성을 입증하는 거주면이 조사됨으로써, 이 토성은 다수의 주민들이 생활하였던 거주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이때 출토된 유물은 크게 토기와 석기로 분류된다. 토기는 5종류 15점으로 대체로 석영립이 섞인 질이 거친 민무늬토기(粗質無文土器)와 재료인 바탕 흙이 부드럽고 그릇 벽이 엷은 흑도(黑陶)와 주황색 토기였으며, 토기의 아가리 부분 6점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석기로는 단면이 타원형에 가까운 양날의 돌도끼와 완형에 가까운 숫돌, 그리고 방추차 등이 발굴되었다. 아울러 성 내부에서 출토되는 토기편의 양이나 기타 건축관계 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이 성은 방어용 토성이지만 평시에는 많은 일반민이 살고 있었던 반민반군적(半民半軍的) 읍성(邑城)으로서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 인정되었다.
1977년 현대아파트 건립을 위한 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적어도 4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즉 기원 전후의 문화층으로 풍납리식 무문토기와 중도식 무문토기, 3중의 환호(環濠)가 발굴되었다. 다음 서기 1∼2세기 문화층으로 6각형 수혈집터에서 회청색 연질토기와 낙랑계(樂浪系) 토기가 발굴되었다. 서기 3∼4세기의 제3문화층에서는 6각형 수혈주거지에서 회청책 경질토기가 발굴되었다. 서기 4세기 이후 475년 웅진(熊津) 천도 시기까지의 제4문화층에서는 사각형 또는 장방형의 수혈집 자리에서 회청색 경질토기가 발굴되었다.
또한 문화재청이 1999년 6∼9월 성 동쪽 벽을 일부 절단하여, 이 토성이 폭 40m,높이 9∼15m에 이르는 거대한 판축(板築)토성임을 확인하고, 이때 나온 나무ㆍ목탄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2세기∼기원후 2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판명되었다. 성벽 내부에서 그 축조시기보다 앞선 시기의 주민들이 사용했던 높이가 입지름보다 깊은 단지인 심발형(深鉢形) 토기와 경질무문토기도 나와 이 풍납리토성의 역사가 백제의 건국시기와 일치하여 현재 하남위례성의 유지(遺址)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1999∼2000년에 걸쳐 계속된 한신대학교 박물관의 경당지구 발굴에서 제사유적과 제사 후 폐기된 도구와 음식을 버리는 구덩이로 추정되는 유구, 기와와 건물바닥에 까는 전(塼), '大夫(대부)' '井(정)' 등의 문자가 새겨진 토기를 비롯한 다량의 토기조각, 유리구슬 조각, 제사 때 희생(犧牲)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12마리분의 말의 머리 등이 나왔다. 특히 제사유적의 주 건물은 길이 13. 5m, 폭 5.2m, 깊이 3m의 '呂(여)'자형 지상가옥이었다. 이러한 제사유적은 전근대국가에서 조상과 하늘에 제사지내는 왕성(王城)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따라서 거대한 규모의 성벽과 조상신과 하늘 및 오곡백과의 풍요를 비는 제사유적 등이 확인됨으로 인하여 풍납리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성이었음이 더욱 유력해졌다.
한편 풍납리토성의 축조 방법을 보면 본래 몸체를 흙으로 쌓은 토성이지만, 조사에 의하면 단면은 돌이 거의 없고 고운 모래 뿐인데 그것을 엷은 층으로 한층 한층 다져 쌓아서 올라간 것이다. 특히 동벽의 절단 조사 결과, 이런 규모의 성곽 축조에 필요한 인력이 수십만∼수백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한 시기도 기존의 기원 후 3세기에서 최대 400년까지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의 초기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토성의 성격 규명은 백제사뿐만 아니라 한국고대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전망이다. 원래의 토성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었으며, 주위는 약 3.5km, 남북 2km, 동서 1km에 이르렀으나, 한강 쪽의 서벽은 1925년의 큰 홍수로 흘러가버렸다. 그러나 나머지 3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동벽은 이 보다 규모가 큰 곳도 일부 있고, 거의 같은 간격으로 4군데가 외부로 통하게 되어 있는데, 축성 당시부터의 문지(門址)로 믿어지고 있다. 이와 달리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북벽의 경우 정상에서 약 2m 내려간 위치에서 1단의 넓은 단(段)을 만들었고 거기서부터는 경사를 죽여서 폭 30m 가량의 기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토성의 자취를 인정할 수 있는 주위는 2,679m밖에 안된다. 이 가운데 1973∼1978년까지 5년 동안 3회에 걸쳐 446m가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나 나머지 구간 약 2,233m는 복원되지 않고 풍화된 상태로 남아있으나, 서울특별시와 정부에서는 풍납리토성 안의 사유지를 점차 매입하여 정비ㆍ복원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