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좁다란 돌담길을 오르다보면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이 제주도에서 잠시 거주하던 당시의 집을 복원해 놓은 집을 만나게 됩니다.그와 가족 4명이 거주하던 공간이 1평이 조금 넘는 공간이였다하니 그때의 힘들었던 상황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1평남짓한 방안에 들어서면 그의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가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지주의 아들로서 어렸을 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청년기에는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기도 하면서 그의 기질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6.25 전쟁은 그에게 고난과 빈곤의 삶의 시작이었다. 1951년 동란기에 이중섭은 삶과 예술의 자유를 찾아 남하, 제주 서귀포로 향한다. "서귀포가 더 좋소, 서귀포 칠십리에 물새가 운다는 노래도 있지 않소. 임자는 그리 가오"라는 낭만적인 권유가 그를 자극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제주도에서 1년이채 못되어 부산으로 돌아와 겪게 되는 가족과의 이별. 이후로 그는 더욱더 파란만장하고 곤궁했던 삶을 살다가 급기야는 정신 이상 증세와 영양실조, 마침내 1956년 불우한 삶을 마감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생애를 보면 한마디로 파란과 불운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힘과 역동적인 움직임은 이러한 역경과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그 자신의 내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편, <파란 게와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등의 작품은 그가 제주 서귀포에 머무를때 남긴 것으로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경과 넉넉한 인심 등을 소재로 한 목가적인 작품들이다. 사실 제주에 도착해 여러날을 걸어서 도착한 서귀포에서조차도 생계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불행했던 가족사 중 이곳에서의 1년은 행복했던 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파란게와 아이들>은 그의 두 아들과 숱하게 잡아먹었던 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렸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 후 제주도를 떠난 후의 작품에서도 그 절을 그린 그림이 많은 것을 보면, 짧은 기간 그의 서귀포 체류는 대향 이중섭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 자료 인용-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주지를 나와 조금 더 오르면 이중섭 박물관을 만나게 됩니다. 화가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는 작품과 스케치했던 그때의 그림 그리고 가족과 주고받던 서신의 내용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실에서는 촬영이 불가하여 밖에 판매를 위해 모작된 작품들을 담아 보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란 게와 어린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황소(195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와 새와 새(1954)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흰소(195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달과 까마귀(1954)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길 떠나는 가족(195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거지에서 올려다 본 박물관 전경


그의 불행했던 가족사 중 이곳에서의 일년은 가난하지만 그래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의 행복한 삶이 묻어 있는 한평남짓의 방
그 한쪽 벽에 붙여져있는 시를 옮겨봅니다.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은 두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

-대향 이중섭 짓고 창남 현수언 쓰다_

Posted by 하늘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