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가 있는 마당이 인상적인 고택, 백하구려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집안에 심지 않는 나무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행(

)자를 분해하면 입에다 나무를 심는 형상이라고 해서 입안이 바짝 마르게 한다 즉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고 해서였다고 하는데요.이밖에도 몇가지 나무가 있는데요. 귀신이 못 온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는 집에서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하고 해바라기와 능소화는 양반나무라해서 평민들의 집에는 심지 못하는 나무였다고 합니다.평민이 능소화를 심으면 관아에 끌려가 볼기를 맞았다고도 하네요.


이렇듯 집안에 심지 않는 은행나무가 있던 백하구려이지만 이 고택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듯 싶어요. 집안에 심지 않던 은행나무는 공자나무라해서 향교나 서원에서만 심었다고 하는데요. 백하구려에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유래가 깊은 집으로 교육기관에서만 심던 은행나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설명이 될듯도 싶습니다.지금도 오래되고 큰 은행나무는 향교나 서원이 있던 곳임을 알려준다고 하는데요. 백하구려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교육의 현장이였다는 걸 이 은행나무가 말해주는듯 싶습니다.

 



은행잎이 뒤덮은 마당




담장 아래에선 담쟁이덩쿨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은행나무가 뒤로 보이는 저 건물이 화장실...
겉모습은 옛스럽지만 안의 내용물은 모두 현대식..




은행잎이 떨어진 지붕의 기와가 운치가 있습니다.






은행나무뒤로 고택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백하구려
이 집은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유래가 깊은 집이라고 하는데요. 그의 나이 42세때(1885년) 세운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이 가옥은 앞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채 아래채입니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층 기단위에 서 있으며, 아랫층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령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앞쪽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2칸은 큰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로 방이 한 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고, 아래채는 사랑방과 붙어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 아래방, 마루방이 1칸씩 배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 방이 놓이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뻗어 안채의 아랫방에 접해있다고 합니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선생의 애국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유서가 깊은 장소입니다.






가지만 들어낸 마당의 나무가 스산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고택의 가을




이렇게 또 2011년의 가을도 저물어 가는군요.





Posted by 하늘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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